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문단 편집) == 결과 == 메시나의 점령과 함께 시칠리아 전역은 완전히 끝을 맺었다. 미군이 서부를 완전히 평정한데다 추축군이 침착하게 병력을 온존하며 퇴각한 덕분에 잔당 소탕도 거의 필요 없었다. 시칠리아를 점령하게 되면서 사실상 지중해의 제해권은 완전히 연합군에게 넘어갔다. 애초에 이탈리아나 독일이나 지중해에서 산발적인 저항만 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축군의 주력의 상당수가 무사히 이탈리아 본토로 탈출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서는 반쪽짜리 승리에 그치고 만 셈이 되었다. 퇴각전 지휘를 맡은 한스팔렌틴 후베 장군이 효과적으로 시간을 벌면서 차근차근 병력을 물렸기 때문에 추축군은 비교적 온존한 병력으로 본토에서 저항을 이어가게 된다. 더군다나 메시나 해협 건너편을 해안포로 도배를 해 버려서 연합군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패튼은 이 전역에서 있었던 일로 몽고메리라면 완전히 이를 갈게 됐으며 몽고메리도 자신이 노린 전공을 가져간 패튼을 경계하게 되었다. 추가적으로 몽고메리는 자신이 보여준 이기적인 처신 때문에 많은 미군 장성들과도 척을 지게 되었다. 온화한 성격으로 대부분의 장병들과 잘 어울렸던 [[오마 브래들리]] 장군조차도 몽고메리라면 학을 땠다.[* 이러한 반목이 이후 작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저 개인적인 반목이라고 봐도 좋다.] 또한 이 침공은 [[동부전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침 시칠리아 침공이 시작될 당시 동부전선에선 최대의 전투인 [[쿠르스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패색은 이미 짙어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시칠리아 침공이 벌어지면서 히틀러는 병력을 이탈리아 쪽으로 차출해야 했다. 차출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일군이 쿠르스크에서 당초 의도했던 돌출부 절단과 소련군 섬멸은 당시 독일군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엉망이었던 공수작전에 대해 조사를 한 미군은 영국 공수부대에서 이미 운용중이던 [[패스파인더]][* 선두에서 먼저 강하해 후발대의 강하 지점을 확보하고 표시하는 조.]가 없어서 효율적인 공정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후 영국에게서 패스파인더 노하우를 받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실전투입은 했지만, 운용에 미숙해서 사실 그렇게 효율적으로는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전 공수작전에 비해 나아졌기 때문에 각 공수부대에 패스파인더가 도입되었고. 전후에는 패스파인더보다 더 정밀한 공정통제에 대해 필요성을 느껴서 1953년에 공정통제사([[CCT]]) 부대를 만들었다. 시칠리아 침공 중 이탈리아군 및 독일군 포로 73명이 학살당하는 전쟁범죄가 일어났다. 비스카리 학살이라 불리는, 연합군에 의한 학살사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다. 또한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탄압받아 세력이 많이 위축되었던 [[마피아]] 조직들이 미국에 있는 친척 마피아 조직들의 중개를 받아 점령군인 미군의 군수 및 민사행정에 협조하면서 세력을 다시 회복하기도 했다. 이들은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기 전부터 연합군에게 상륙이 원활한 지역과 추축국군의 배치와 순찰시간을 알려주는 등 정보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